20081003

당신은 인내심많은 감상자

아까 내가 한 얘기에 소리내어 웃던 당신의 모습이 기억나.
그 웃음소리를 어설프게 따라해보기도 하면서 나까지 기분좋았었어.
무슨 얘기였는지 벌써 기억나지 않는 것을 보면 별 시덥지 않은 농담을 했었나봐.
그런데도 당신이 웃어주어서, 내가 정말 재밌는 사람이고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았어.
그게 내 마지막 모습으로 당신은 나와 함께한 그 즐거운 기억만이 끝까지 남을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어.

밤하늘에 멋지게 부서지는 불꽃놀이도 금방 끝나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재밌게 보던 영화도 자막이 나오면 끝나게 마련이지.
맛있는 치즈케익은 정신차리면 빈 접시에 부스러기만 남아있고 흥미진진하게 읽던 책의 글자란 글자는 다 찾아서 읽었다면 이제 덮어서 책장에 꽂아야 하지.
하지만 당신과 함께 웃던 시간이 지나고 당신을 보내고도 우리는 또 전화를 하고 다시 만나기로 했어.
다음에 만나면 또 당신을 웃게 할 수 있을까? 다음번에도 또 어떤 즐거운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지만, 또 어쩌면 당신과 사소한 일로 다투고 소리지를 지도 몰라.
난 또 재미없게 말도 안 하고 피곤해할지도 모르고, 또 한참 늦어서 당신의 속을 긁어놓을 수도 있어.
아니면 내가 약속시간 다 되서 피곤하다고 다음에 보자고 할 지도 모르지.

당신이 내가 처음이랑 다르다고, 예전에 비해 성의가 없고 잘 바래다 주지도 않는다고 얘기할 때 난 그때의 나는 죽었다고 이제 그 사람 찾지 말라며 받아 넘겼지.
그래, 정말 그렇지는 않지.
지금의 내가, 당신을 만나면 조심스럽게 말하고 당신의 사소한 것에도 신경쓰고 힘들다는 말 안하고 당신만을 생각하던 그 사람과 같은 사람이지.
그 사람은 당신과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당신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갔지.
그리고 다음에 당신을 만나는 시간을 기다렸어.
그리고 그 사람은 당신을 만나고 또 만나고 또 만나고 또 만나고 또 만나고 또 만나고 또 만나고 또 만나고 또 만나고 또 만나고 또 만나고 또 만나고 또 만나고 또 만나고 또 만나고 또 만나고 또 ......
밤하늘에 매일 폭죽이 터진다면 어느 정도 보다가 집으로 돌아가야 할 거야.
영화가 재밌어도 끝나지 않는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자리가 하나둘씩 비워질 거야.
집에 치즈케익이 너무 많아서 먹어도 먹어도 없어지지 않는다면 밖에 지나는 사람 아무에게나라도 줘버리고 싶을 거야.
책이 읽어도 읽어도 끝나지 않는다면 어떨까?
그건 생각만 해도 답답하지 않아?
나중에 남은 뒷부분을 태워버릴지도 몰라.

당신과 내가 만나는 일이 신기하게도 아직까지 이어져서, 또 당신을 만나서 그 수도없이 봐온 얼굴들을 서로 한번 더 보게 될 거야.
그런데도 당신은 또 나를 보면 반갑게 인사할 거고 또 어쩌다 내가 어설픈 농담을 하거나 장난을 치면 아이처럼 즐겁게 웃을 거야.
또 내가 당신을 기분 나쁘게 해서 삐져도 금세 그걸 잊어주고 다시 날 받아줄 거고.
그게 언제까지일까?
다른 모든 것은 끝이 없다면 지치고 지겹고 답답하고 짜증나겠지만, 당신과 함께하는 것은 끝이 없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꼭 당신이라면 나와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이렇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의 그 인내심 때문이야.
나를 포기하지 않고 한번 더, 또 한번더, 정말 안 될 것 같은데도 한번 더 받아주는 당신을 보며 처음에는 신기했지만 이제는 놀랍다못해 두려움이 생길 정도로 당신이 존경스러워.
어떤 우울한 날엔 세상 모든 것이 다 맘에 안 들어 이것저것 불평을 하다가 당신을 생각하다가 탁 끊겼어.
당신을 생각하니 더이상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놈인 것처럼 행세할 수가 없더라고.
당신이 나와 함께 있는데 그런 것쯤 뭐 상관 없잖아.

당신은 아주 긴 공연을 묵묵히 보는 아주 인내심 많은 감상자같아.
당신 덕분에 내 어설픈 개그들은 끝나질 않지.
당신과 함께 하는 시간이 조금씩 조금씩 끝나지 않고 언제까지나 이어졌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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