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211

슬픔이여 안녕을 읽고

프랑소아즈 사강은 이 소설을 18세에 지었다고 한다.

슬픔이여 안녕에서 안녕은 불어로 작별할 때의 안녕이 아니고 반갑게 인사할 때의 안녕이라고 한다.

예전에 화정역에서 약속시간 남아서 전철역 한구석에 의자랑 책이랑 놓아둔 곳에 가서 얇은 책을 하나 집어서 읽었다. 읽다보니 재밌어서 가만히 앉아 가끔 사람들이 우르르 내릴 때마다 민망해 하면서 3분의 1쯤 읽었다. 집에 두고 조금씩 생각 날 때 읽다가 좀 전에 마저 읽자고 결심하고 다 읽어치웠다.
간단하게 얘기하자면 자신의 욕구에 따라 사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사는 부녀가 있다. 아버지는 나이들었지만 매력적인 바람둥이다. 딸은 아버지와 친구처럼 지내고 있다. 아버지는 엘자라는 젊은 여자와 사귀고 있는데 안나라는 죽은 아내의 친구를 만난다. 그녀는 상식적이고 고지식해서 지금까지 만난 육체적인 여자들과는 색다른 점이 매력적으로 여겨졌다. 결국 아버지는 젊은 애인을 버리고 안나와 결혼하기로 한다. 딸은 안나가 이전에 자신과 아버지에게 없던 안정과 평온함을 가져다 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딸 세실은 안느가 두 사람에게 점차 변화를 가져오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고 자신의 애인인 시릴르를 만나지 못하게까지 하자 장난처럼 어떤 계략을 생각해 낸다.
줄거리를 다 얘기하기가 싫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다가 줄거리를 다 알게 되면 실제 책을 읽을 때 김샐 것이기 때문이다. 난 아무런 사전정보 없이 책을 읽었다. 그게 책을 온전히 느끼면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게 했다고 생각한다.
세실은 결국 슬픔을 받아들이고 인사를 나누었지만 그것이 세실을 성장하게 만든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이 성장이라고 하더라도 안느의 생활방식처럼 상식적이고 평범한 가치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좀 더 공허하고 시니컬하게 만드는 도구가 되었을 뿐이다. 아버지와 딸은 가끔 안느를 회상하겠지만 아버지와 딸의 삶이 변화되었을 것 같지 않다. 세실의 공허함에 공감해하기도 하고 앞으로도 평생 그런 식으로 살 것이라 생각하니 불쌍하기도 하고 그런 사람들은 좀 힘든 일을 겪어봐야 하고 병에 걸리거나 가난해져야 좀 더 삶에 절박해지지 않을까하는 얄미운 마음도 들었다. 평생을 자신의 욕망에 따라 자신을 파괴시키면서 살며 공허해하는 삶은 스스로 슬퍼하기도 부끄러울 것이고 주위의 깊은 동정을 받을 수도 없다. 난 더 절박하게 생을 붙잡으며 더 높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바라보며 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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