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421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읽고

  지금은 이런 간결한 제목을 붙이고 싶다. 간결한 제목속에 그럴 듯한 글들이 더 빛났으면 좋겠고 그러지 않더라도 제목이라도 간결하니 추함이 덜하겠지.

 리사라는 이름의 여인이 등장한다. 게임의 캐릭터 만들 때 여자이름으로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나치게 멋지고 예쁘게 그려지지도 않았지만 충분히 잊지 못하고 떠올릴만한 여자니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지도 않지만 적절히 어두워 더 끌리는 사람. 그러나 나와 가까워지지는 못할 사람. 그러니 캐릭터 이름으로 딱.

 주인공 이름은 뭐더라? 이름이 나오지 않았던 것도 같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세상 모든 것을 증오하며 그러기에 앞서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 자학하며 쾌감을 느끼면서도 아파하는 사람이라고 하자.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도 해보고 안타깝기도 하고 나는 저 정도는 아니지 하고 비웃어도 보았다. 이 책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인간의 고결함과 추악함을 현실을 넘어 사실적으로 그리면서도 지나치게 극단적이어서 비현실적이다. 그래서 마음에 든다. 내가 소설을 쓸 수 있다면 이런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 안에도 여러 극단의 성질들이 양립하고 있지만 그것들이 표현되지 않고 있는데 그것이 잘 조절되어 평화로운 상태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결정내리지 못하고 주저하는 가운데 망설이고만 있는 상태이다. 너무 겁이 많다. 좀 더 나 자신을 드러내야겠다는, 그보다 드러내고 싶다는 충동이 생겼다. 글로 뭔가 표현을 해보고 싶어졌다.

 뭐라도 결론을 내리자면, 처음에 이 책을 읽으며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그럴듯한 변명이나 위안으로 삼았다. 하지만 어떠한 것으로도, 사회에 적응 못하는 걸을 변명할 것이 되지는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메고 고민하는 것이 이 책의 주인공의 모습이고 도스또예프스키가 표현하려고 했던 인간의 특성이고 나를 잘 드러내는 것이다. 목적이 분명하고 합리적인 행동을 잘 하는 사람에게는 거리감을 머뭇거리고 고민하면서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는 사람에게는 동질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렇다고 비생산적인 회의와 고뇌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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