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116

육교를 걷다가 발견한 것


빤쓰


Originally uploaded by eunduk.


육교를 걷다가 계단 틈에 들어간 하얀 천뭉치 같은 것을 보았다. 자세히 보니 여성용 팬티였다. 일단 폰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두고 어떤 이유로 저것이 저기에 있을까를 상상하고 이것에 대해 글을 쓰리라 마음 먹었다.


그런데 집에 와서 대체 무엇 때문에 저 팬티에 대한 글을 써야 하는 것인지 그저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되는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던가는 별로 상관이 없는데 내가 무심코 한 행동이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기분나쁘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되었다.

군대 갔다 와서 특히 내가 하고 싶은 쓸데 없는 작은 일들을 실천하는 게 습성이 되어버렸다. 지나가다 먹고 싶은 것 먹고 아무 때나 돌아다니고 싶으면 돌아다니고 친구들에게 문득 생각난 것을 장난쳐보고 하는 것 같은 일 말이다. 군대에서 하고싶은 것 하지 못하고 억눌렸던 욕망들이 아직까지도 발산되는 것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주일에 교회 청년부 친구들에게 얘기 해봤는데 별로 큰 일 아니라고 그런거 써도 상관 없다고 해서 용기내어 쓴다.


저 팬티가 왜 저기에 있을까? 몇가지 가설을 세워보았다.


1. 어떤 여자가 술먹고 오줌쌌는데 친구가 편의점 가서 새 팬티를 사서 입히고 집에 보낸 후 자기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주머니에 있는 팬티를 버릴 곳을 찾다가 육교 계단 틈에 버렸다.


2. 어떤 여자가 잠이 안 와서 새벽에 옷장 정리를 하다가 사연이 있는 팬티를 발견한다. 그 팬티는 예전 남자친구가 사준 것이다. 그것을 들고 새벽에 예전에 함께 거닐던 추억의 길을 더듬어 간다. 걷는 도중에 육교에 다다르자 감정에 복받쳐 눈물을 흘리는데 주머니에 마땅히 눈물을 닦을 것이 없어 팬티로 눈물을 닦는다. 그리고는 그 팬티를 저 육교 계단 틈에 넣고는 이제 다 잊기로 결심하고 집에 돌아가 편안하게 잘 잔다.


3. 한 할 일 없는 남자가 육교 계단 틈에 여성용 팬티를 넣어두면 얼마만에 없어지는지 궁굼해서 새벽에 몰래 저기다 넣어두고 매일 주기적으로 확인하러 온다.


어떤 이유에서건 낯선 장소에 있는 팬티 한 장 덕분에 혼자 상상해보고 글도 쓰며 놀 수 있었다.


육교 계단 틈에 팬티 넣어두신 분 고마워요.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