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924

먹으면 나아진다.

eunduk | 24 9월, 2006 22:21

얼마 전에 친구가 오랜만에 전화를 했다. 나에게 어떻게 지내냐고 물어서 조금 힘들 때도 있지만 지낼 만 한 것 같다고 했다. 그 친구는 어떤 상태인지 알 것 같다고 했다. 그 친구는 그 친구의 표현으로는 조금 센치해진 것 같다고 했다. 가만히 전화기에 있는 전화번호를 뒤적거리다 오랜만에 전화를 했을 친구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친구가 어떤 기분일 것인지 나름대로 짐작했다. 별 얘기 없이 몇 번 웃다가 다음에 아는 사람 결혼식 때나 보자고 하고 끊었다.

기분이 조금 가라앉고 잘 웃게 되지 않는 어떤 날들이 내게도 있었다. 그때 나도 반갑게 통화할 만한 사람을 찾아 전화를 했었다. 무엇이 힘든지도 모르면서 그저 그 친구와 별 얘기 없이 몇마디 통화하는 걸로 조금 위안이 되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지내다 보면 기분 좋은 날이 오기도 하고.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날 힘들게 했던 것 알고 보면 단순한 것이었다. 성적이 조금 나쁘거나 나보다 더 잘 나가는 친구 소식을 듣거나 학교에 자꾸 지각을 해서 스스로가 한심하게 생각되거나 왜 나는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나 밥 먹기가 귀찮아 안 먹고 딴짓하다가 나중에 너무 배고픔을 느꼈거나 갖고 싶은 물건을 못 가지고 있거나 하는 것들이다. 무언가 엄청난 것이 내 삶을 누르고 있는 것 같았는데 막상 찬찬히 나 자신을 들여다 보면 아주 사소하고 단순해서 누군가에게 내가 이런 것으로 이렇게 힘들어 한다고 말하기 민망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잘 모르겠지만 난 그렇게 사소하고 유치한 것들로 고민하는 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민하는 것들의 실체가 별 거 아닌 것처럼 그것을 해결하는 것도 별 거 아닌 것으로 가능하다. 내가 찾은 좋은 방법은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이다. 내 머리속은 단순해서 여러가지 복잡한 감정들이 함께 공존하기 힘든가 보다. 맛있는 것을 먹으면 그것으로 행복한 감정이 나를 온통 휘감아서 무엇을 고민하고 힘들어 했는지도 잊어버린다. 물론 편안히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있다면 훨씬 좋다. 무언가로 또 힘들어할 때마다 내가 살아있는 한 먹을 것이고 먹는 것이 날 기분좋게 할테니 그래도 어느정도는 살 만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거기다가 아직 내가 먹어보지 못한 맛있는 음식은 또 얼마나 많은지.

요즘 여자친구가 힘들다고 했다. 무엇이 그리 그녀를 힘들게 하는 지는 확실히는 잘 모르지만 먹으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잘 먹였다. 그랬더니 어쩜 그렇게 맛있게 잘 먹는지. 함께 먹으며 먹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이 얼마나 뿌듯하고 행복했는지. 서로 얼마나 흐뭇한 미소를 지었는지. 여자친구와 함께 맛있게 먹으며 서로를 보며 미소를 짓던 그 순간이 내 삶의 행복한 순간임은 부인할 수가 없다.

나를 이렇게 단순하게 지어주신 하나님에게 감사한다.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게 만드셨는데 먹을 것은 온 세상 천지에 널렸으니 감사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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